BIB 황금사과상 수상 작가 이명애 작가의 신작 그림책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는, 사라지지 않을 이야기 『꽃』
또르르르, 빨간 동그라미를 따라
이야기는 배경이나 설정 없이 시작된다. 최소한의 묘사로 그려진 인물이 등장하고, 선명한 것은 세 개의 동그라미뿐이다.
툭 떨어져 구르는 동그라미를 따라 책장을 넘기면서 우리는 준비된 이야기 안으로 서서히 진입하게 된다.
타이틀 페이지를 지나고, 동그라미들의 명료한 형태와 색의 스펙트럼이 만들어내는 깊은 진공을 통과한 인물은
드르륵, 꽃가마의 문을 열며 가뿐하게 기지개를 켠다.
이어 이마와 두 볼에 얹힌 빨강을 돌돌 꾹꾹 뭉쳐서 머리 위에 척!
기분 좋게 이끄는 노랑을 따라 휙 점프하고, 눈앞의 길을 따라 무심히 걷기도 하고,
동그라미 자체의 맛과 질감을 만끽하기도 하면서 인물은 나아간다.
전체적인 톤을 구성하는 동양적인 요소들과 단순하고 과감한 그래픽적 이미지가 겹치고 섞이며 만들어내는 힘으로 인해 장면 장면이 춤추는 듯한 율동감을 품고 있다.
글 없는 그림책이 보여 주는 섬세한 연출의 정수
『꽃』은 또한 글 없이 전개되는 그림책만의 섬세한 연출의 정수를 보여 준다.
작가는 자연스럽게 배치한 앵글을 통해 독자가 책 속의 공간을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화면을 분할해 연쇄의 묘미를 연출하고, 물리적인 접지선을 이용해 차원의 전환을 시도하기도 한다.
짧은 대사와 음성 상징어들은 상황 전개에 유머를 더해 준다.
꽃가마에서 꽃상여까지, 마치 하나의 ‘막’을 연상하게 하는 구조 안에 담긴 것은 스스로의 살아있음을 각성하고,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성장하고, 일하고, 놀고, 고난과 싸우고 마침내 사위어 사라지는 곡진한 순환의 서사이지만,
작가의 목소리는 결코 무겁지 않다.
‘꽃’이라는 상징 속에서 그가 가리키는 건 명징한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변화무쌍한 외부와 나 사이의 끝없는 대화에 담긴 위트와 세부를 통해 드러난다.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꽃비가 내려옵니다
내가 누구인지 잊어도 좋겠습니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흐드러지는 동그라미들은 어쩌면 생의 본질을 쪼개고 쪼개서 남는 최소 단위를 상징하는 듯도 하다.
처음에 어디에선가 날아와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던 동그라미들은 주체에 의해 발견되기도 하고,
그것을 자극하기도, 유희의 도구가 되기도 하면서 주체의 언어와 섞이기 시작한다.
대단원에 이르러 그 경계는 점점 무의미해지고, 마침내 동그라미들로 인해 내가 지워지는 역설이 벌어진다.
시각적으로 팽팽하게 차오르는 이 무력감은 각자의 생이 그려 온 무늬와 공명하며, 저마다의 결정적 순간을 독자 개개인의 빈 페이지로 데려오고 만다.
『꽃』의 메시지를 더욱 생동감 있게 시각화하기 위해 시도한 여러 디자인 아이디어와,
표지와 속표지의 관계 속에 배치한 깊이감, 뒷표지의 여운과 실의 색이 드러나도록 한 장정 등 이야기 바깥의 다양한 파라텍스트까지도 함께 즐겨 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