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디북 리뷰 : 프로기
삼십 년 전, 어린이 책 편집자 피터 웬더스Peter Wenders의 집에 해리스 버딕Harris Burdick이라는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열 네 개의 이야기를 만들었다며, 각각에 해당되는 그림 열 네 장을 보여주었다. 웬더스는 그림을 마음에 들어 했고, 버딕은 다음 날 아침, 이야기를 모두 가져와서 보여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고, 이후 어떤 연락도 없었다. 웬더스는 버딕의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고, 친구들과 함께 그림 수백 가지의 이야기를 만들고 또 만들었다. 그리고 삼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열 다섯 번째 그림이 발견되었다.
ARCHIE SMITH, BOY WONDER
A tiny voice asked, "Is he the one?"
아주 작은 목소리가 물었다. “얘가 걜까?” “어쩌면, 하지만 아닐지도 모르지.”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아. 지금껏 몇 번이나 실망만 했잖아.” 작은 목소리들은 어느 덧 밤의 어둠 속으로 멀어져갔다. 소년은 한 번도 깨지 않았고, 아침까지 푹 잤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THE THIRD-FLOOR BEDROOM
It all began when someone left the window open.
모든 일이 시작된 것은, 누군가 창문을 열어둔 채 놔뒀던 때였다. 그게 누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유난히 변덕스러웠던 그 해 봄답지 않게 따사로운 봄바람이 열린 창문을 통해 그 낡은 집 안으로 불어들지만 않았다면, 소년의 삶은 자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평화롭고 지루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MR. LINDEN'S LIBRARY
He had warned her about the book. Now it was too late.
린든씨는 그녀에게 그 책에 대해 경고했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녀는 놀랍게도, 어떤 남자보다도 빨리 외출 채비를 차리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 날도 완벽하게 성창을 차리고 린드씨를 기다리던 데이지양은, 따뜻한 바람에 모자와 장갑을 차례로 벗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거추장스러운 하얀 비단 장갑을 벗지만 않았다면, 그 책을 펼쳐봐야겠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OSCAR AND ALPHONSE
She knew it was time to send them back. The caterpillars softly wiggled in her hand, spelling out "goodbye."
꿈 속에서 데이지양은 어린 소녀였다. 오스카와 알폰스, 이제 그들을 돌려보낼 때가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번데기들이 꿈틀거렸다. “안녕.”이라고 또박또박 말하고 있었다.
UNINVITED GUESTS
His heart was pounding. He was sure he had seen the doorknob turn.
“데이지?” 린든씨는 이제야 간신히 준비를 마쳤다. 약혼녀를 찾아 거실로 가려던 그는 선물로 가져갈 포도주를 아직 챙겨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헐레벌떡 계단을 내려가던 린든씨의 눈이 갑자기 지하실 문에 멎었다.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문 손잡이가 돌아가는 것을 틀림없이 보았다.
UNDER THE RUG
Two weeks passed and it happened again.
린든씨는 허겁지겁 방으로 올라갔다. 도망쳐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무작정 뛰었다.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었다. 완전히 봉인했다고 자신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경고를 무시했다. 두 주일이 지났고, 다시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린든씨는 절망에 빠져 의자를 내던졌다.
A STRANGE DAY IN JULY
He threw with all his might, but the third stone came skipping back.
하지만 그가 던진 것은 의자가 아니라 조약돌이었다. 이건 꿈일까? 아니, 그 지긋지긋한 놈이 다시 나온 것이다. 린든씨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여섯 살이 아니다. 나는 서른 두 살이고, 물수제비를 뜨며 꾸는 꿈 따위는 머리카락과 함께 잃어버렸다. 린든씨는 손에 쥔 돌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던졌다. 하지만 세 번째 돌은 물 위로 총총 돌아왔다.
MISSING IN VENICE
"This time she'd gone too far."
자기 눈을 향해 똑바로 날라드는 조약돌을 피해 눈을 감았던 린든씨는 누군가 한숨을 쉬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 여자가 이번에는 너무 멀리 가 버렸어.” 그가 다시 눈을 감아버리지 않은 것은 그 목소리가 너무나 친숙했기 때문이다. 그는 손에 쥔 괴상한 지팡이를 내던져버리지 않았다. 머리에 쓴 우스꽝스러운 뾰족모자를 팽개쳐버리지 않았다. 가야 한다. 그녀를 구할 사람은 그 자신뿐이다. 고개를 끄덕인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바닥이 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면서 그는 친숙한 목소리가 도대체 누구의 것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혹은 그녀의 얼굴을 기억해낼 수 없었다.
MISSING IN VENICE
Even with her mighty engines in reverse, the ocean liner was pulled further and further into the canal.
얼굴을 할퀴는 차가운 바람에 데이지양은 눈을 떴다. 문득 손을 얼굴로 가져간 그녀는, 자기가 울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순간 데이지양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 자기가 누구인지, 왜 여기 있는 것인지 알고 나자 차가운 바람과 거친 물결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강력한 엔진이 있는 힘을 다해 역회전을 하는데도 배는 점점 더 운하 속으로 빨려들어가기만 했다. 데이지양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CAPTAIN TORY
He swung his lantern three times and slowly the schooner appeared.
“이제 가야할 때야. 미안하지만 너 혼자 가야 한단다. 알고 있지?” 소년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그 목소리가 할아버지였냐고 묻고 싶었지만 린든씨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노인은 등불을 세 번 흔들었다. 그러자 천천히 돛단배가 나타났다. 소년이 타자마자 배는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선원들은 아무 말 없이 입을 꼭 다물고 자기 할 일만 했다. 린든씨는 제일 큰 돛대에 기대서서 울렁거리기 시작하는 속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ANOTHER PLACE, ANOTHER TIME
If there was an answer, he'd find it there.
하늘이 새카매졌다. 바람이 점점 강해져 돛은 찢어질 듯 펄럭였다. 린든씨는 돛대에 몸을 비끄러맬까도 생각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배는 요동이 심하긴 했지만, 아까보다도 더 속도가 빨라졌다. 참다못해 린든씨는 지나가던 선원을 억지로 붙잡았다. “괜찮을까요? 이 배? 사실은 저... 수영을 못하거든요.” “수영?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헤엄 같은 걸 쳐서 뭘 하려고?” “혹시 배가 뒤집히기라도 하면...” 린든씨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배는 더 이 상 바다 위에 있지 않았다. 안개 속, 끝없이 이어진 선로 위로 배는 달리고 있었다. 당황해하는 린든씨를 아까부터 보고 있던 선원 하나가 동료에게 속삭였다. “계속 궁금했던 건데, 저 애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 건지 알고 있는 걸까?” “십중팔구 모르겠지.” 동료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거기에 만일 해답이 있다면, 찾을 수 있을 거야.”
JUST DESERT
She lowered the knife and it grew even brighter.
요리사가 칼을 더 가까이 가져가자 호박은 아까보다도 더 밝게 빛났다. 그녀가 드디어 칼을 꽂으려는 순간 데이지양이 외쳤다. “안돼요!” “넌 어디서 나타난 거지?”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그걸 자르면 안돼요.” “그냥 디저트일뿐이야. 호박파이를 만들거라구.” “절대 안돼요. 그걸 자르면, 만일 그걸 자르면...” “이제야 알겠군, 네가 누군지.” 요리사의 칼날이 단호하게 호박을 갈랐다.
THE HARP
So it's true he thought, it's really true.
사실이었어, 그는 생각했다. 정말 사실이었어.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알고 있었다. 저 하프를 보지 않으면 된다. 혹시 쳐다보더라도, 건드리지 않으면 된다. 아니, 건드리는 것까지는 괜찮아, 튕기지만 않으면 된다. 그저 얌전히, 돌과 돌 사이를 건너뛰어, 계곡을 지나가기만 하면...
THE SEVEN CHAIRS
The fifth one ended up in France
“이번에도 실패했구나.” “미안, 오스카. 정말 미안해, 알폰스.” 데이지양은 의자에 앉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 넌 최선을 다했잖아.” “왜 이렇게 되어야 하지? 왜 너희들과 영원히 함께 ㄴ있을 수 없는 거지?” 데이지양은 흐느꼈다. “일곱 개의 의자.” 오스카가 노래부르듯 말했다. 그러자 데이지양이 앉아있는 의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첫번째 의자는 이탈리아의 교황에게, 두 번째 의자는 중국의 이발사에게, 세 번째 의자는 ”나머지는? 나머지 의자는 어떻게 되는 거지?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의자는?“
THE HOUSE ON MAPLE STREET
it was a perfect lift-off.
완벽한 착륙이었다.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위태롭게 앉아있던 데이지양은 털끝만치도 긁히거나 부딪히지 않았다. 의자는 얌전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오스카도 알폰스도 없는 이 곳은 프랑스의 대성당이 아니다. 린든씨의 침실, 아직 한 번도 둘이 사랑을 나누지 않은 침대 앞 마룻바닥에 의자는 사뿐하게 놓여 있다. 데이지양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늦지 않았어.” 여느 때와 다름없어 보이는 침실 벽은, 깜짝 놀랄 정도로 커다란 메아리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데이지양은 주눅들지 않았어. “나한테는 아직 기회가 남아 있어!” 메아리는 아까보다도 더 크게, 집의 벽과 벽 사이로 튕겨날았다. 마치 힘껏 던진 조약돌이 동그라미를 만들며 수면 위로 튕겨 멀어져 가는 것 같았다. 그 단호한 울림이 사라지기 직전, 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데이지양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의자 대신 침대에 걸터앉았다. “미안, 알폰스, 용서해 줘, 오스카. 나 이제 정말로 고치를 버려야할 것 같아. 왜냐하면 그가 너무 멀리 가버렸거든. 구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야.” 창밖의 익숙한 풍경들이 조금씩 멀어져간다. 메이플 거리의 집은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완벽한 이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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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소설의 숲으로 여섯 발자국Six Walks in the Fictional Woods’에서, 전형적 작가/경험적 작가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에드거 앨런 포우Adger Alen Poe의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Narrative of Arthur Gordon Pym’를 끌어온다. ‘내 이름은 A.G. 핌이라고 한다’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허구의 화자 핌을 우선 내세운다. 하지만 서문과 후기에는 포우가 직접 나서 이 모험담은 실제 이야기이며, 왜 자기가 대신 이 글을 소개하는지에 대해 말한다. 이제 핌은 화자일뿐 아니라 경험적 작가로 부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독자는 핌을 실존인물이라고 믿는 반면, 다른 독자는 오히려 포우 역시 허구의 인물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한다. 독자는 허상들에 둘러싸여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크리스 반 알스버그Chris van Allsburg는 비슷한 방법을 좀 더 성공적으로 구사한다. 그는 허구의 작가 버딕을 내세우면서, 그 이야기에 자기 자신을 슬쩍 끼워넣는다. 성공한 어린이책 일러스트레이터가 은퇴한 편집자 웬더스를 찾아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알스버그의 그림체를 알아보지 못했더라면 감쪽같이 속아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에 독자가 끼어든다. 포우의 독자는 그저 픽션의 숲에서 헤매는 존재에 불과했다면 알스버그의 독자는 한 발 나아가 스스로의 허구적 칙령들을 제정한다. 적절한 파라텍스트Paratext만 구사된다면, 이는 무한히 재생산될 것이고,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구별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야기는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그것이 형상화되는 것은 글과 그림, 둘 중 어느 쪽이 먼저일까? 이 어리석은, 그리고 흥미로운 질문에 대해 그림과 글 양쪽에서 모두 일가를 이룬 작가 크리스 반 알스버그Chris van Allsburg는 은근슬쩍 후자의 손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태초에 그림이 존재했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이야기를 만든다. 놀라운 것은, 이미 정형화된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무한히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모든 그림을 전부 하나로 꿰어 맞췄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한 장이건 서너 장이건, 아니면 야심만만하게 열 네 장 전부이건, 원하는 만큼 가져다 놓고 이야기를 끌어낸다. 포트폴리오 형식으로 낱장 그림들을 모아놓은 것이니, 같은 그림들을 순서만 바꿔서 배열해 계속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나의 이야기에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삽화라니, 생각만 해도 황홀하다. 이 아름다운 책에 대해 불만이라면 종이가 너무 얇아서 이리저리 마음놓고 늘어놓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적당하지 않다는 정도다.